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19 혁명/진행 (문단 편집) === 4월 11일, 제2차 마산의거[anchor(2차 마산의거)] === [youtube(606kmk81myc)] {{{#!folding [ (시신 포함) 사진 펼치기 · 접기 ] || [[파일:attachment/b0007832_11042133.jpg|width=100%]] || [[파일:attachment/b0007832_11044776.jpg|width=100%]]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EA%B9%80%EC%A3%BC%EC%97%B4%EA%B5%B0%EC%9D%98_%EC%8B%9C%EC%8B%A0.jpg|width=100%]] || || [[김주열]] 열사 || 시신이 발견된 장소 || 당시 시신의 모습 || }}} [[3.15 의거]] 이후 마산 시내의 분위기는 계속 을씨년스러웠다. 멀리 전라북도 남원에서부터 마산상고(現 [[마산용마고등학교]]) 입학시험 결과를 확인하러 왔던 상고생 [[김주열]] 군이 행방불명된 상태였기 때문. 3월 15일 이후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어머니인 권찬주씨는 한 달 가까이 마산 거리를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연히 시민들의 입에서 김주열이란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고 관심도 집중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마산시청(現 마산세무서 부지) 뒤에 있었던 저수지의 물을 몽땅 퍼내고 시신 수색을 했을 정도. 그리고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現 [[마산합포구]] 해안대로 220 [[https://map.kakao.com/?panoid=1026115111&pan=184.0&tilt=3.6&zoom=-3&map_type=TYPE_SKYVIEW&map_hybrid=true&map_attribute=ROADVIEW&urlX=857771&urlY=474400&urlLevel=3|카카오맵 로드뷰]])에서 떠올랐다. [[김주열]]은 3월 15일 형 김광렬과 함께 저녁 시위에 참여했고 시청 앞 발포 이후 경찰이 시신을 거두어들이던 중 오후 10시경 자산동 옛 한전 앞에서 최루탄을 맞고 죽은 상태로 발견됐다. 당시 김주열의 시신을 발견한 경찰은 손석래 서장에게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지 물었고 알아서 처리하라는 손서장의 명령을 듣고 한 사업가의 운전기사를 시켜 마산세무서에서 마산항으로 옮겨 바다에 버리게 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3141706581&code=940100|#]] 그의 시신 사진은 당시 [[부산일보]] 허종(1924~2008) 기자가 찍어 특종으로 보도되었다. 경찰 당국은 [[김주열]]의 시신을 도립마산병원(現 경상남도마산의료원)으로 다시 옮기고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시내로 퍼졌다. 이에 흥분한 3천여 명의 시민들이 경찰의 저지를 뚫고 병원 안으로 밀려들어가 [[김주열]]의 사망을 확인했다. 그의 시신은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몰골이었으며 어머니 권찬주는 충격을 받아 시신의 인수를 거부했다. 나중에 국회 조사단이 조사한 결과 해당 종류의 최루탄은 벽을 뚫고 들어가는 고성능 최루탄이었으며 심지어 그 최루탄에는 "'''군중을 향해 쏘지 말 것'''" 이라는 설명까지 적혀 있었다. '''원래 최루탄은 군중을 향해 쏘는 게 아니라 공중에서 터뜨려서 최루가스로 시위대를 분산시키는 용도다.''' 그러나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는 경찰이 대놓고 직격으로 최루탄을 발사하곤 했다.[* 흥미로운 것은 후일 5공화국 정권을 무너뜨린 [[6월 항쟁]]에서도 [[이한열|경찰이 직사한 최루탄을 머리에 맞아 죽은 사람]]이 나왔고 이 사건이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래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일지도.] 시신은 도립마산병원에 안치되었고 소문은 빠르게 마산 시민들에게 전해져 소식을 들은 사람들로 병원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파일:content_1523497039.jpg|당시 사진]] 시신의 참혹한 몰골을 본 시민들은 당연히 분노가 폭발했고 학생들이 제일 먼저 대열을 이루어 "살인선거 물리치자" 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먼저 [[마산용마고등학교|마산상고]]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와 불종거리를 거쳐 시청 쪽으로 향하며 [[마산고등학교|마산고]] 학생들과 합류했다. 마고는 이미 [[3.15 의거|1차 마산의거]]에서 김용실 군(1-C반 급장)과 김영준 군 등 다수의 희생자를 냈고 이는 상고도 마찬가지였던 데다 시신의 주인공 [[김주열]] 군은 상고 신입생이었기 때문. 3.15 의거 기념사업회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학생들 중 일부가 마산여고와 [[성지여자고등학교|성지여고]]로 올라가서 시위에 참여하라고 교문 밖에서 독려시위를 진행했다. 처음에는 여고생들이 시위에 합류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교사들이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하려고 신발을 전부 감춰 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안전을 이유로 마산여고 교장이 직접 학생들을 인솔하고 나오는 풍경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런 장면이 사진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었고 이 사진은 전국판 신문에 실리며 타 지역의 시위 열기에 다시 불을 붙였다. || [[파일:2010-04-18_214602_j42742478.jpg|width=100%]] || [[파일:ĸó_2016_04_19_09_50_52_369.jpg|width=1000%]] || || 마산 시내를 가득 메운 학생 시위대[* 바로 위 문단의 [[마산용마고등학교|상고]]-[[마산고등학교|마고]] 연합 스크럼이다. 사진을 확대해 보면 모자의 교표에서 앞줄은 마고, 그 뒷줄은 상고. 그 다음줄은 마고..인 것을 알 수 있다. 촬영지는 현재의 오동동으로 추정된다.] || 고문경찰 처벌과 구속자 석방을 외치는 마산여고 학생들[* 당시 마산여고는 현 경기여고 교복과 비슷한 흰 양장 칼라에 검은색 바지 교복이 특징이었다. 성지여고의 경우 세일러 칼라였기 때문에 이 시기를 살던 마산 시민들에게는 한눈에 구분이 가능한 부분이다.]|| {{{#!folding ※ 제2차 마산의거 사망자 명단 : 보기 / 접기 || ''제2차 마산의거 사망자 명단'' || || [[https://315.mpva.go.kr/315c/info/buryManView.do?site_idx=5&nm=&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1960&deathday_end_mm=4&bury_place=005&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8&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24|김영길]] || }}} 4월 11일의 시위는 학생들만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이날 시위에는 중년 여성들도 많이 있었다. 이들은 "'''죽은 자식 살려내라!", "김주열을 살려내라!", "차라리 우리도 죽여달라!'''" 고 절규하며 시위대의 행진에 함께하였다. 또 특이한 점은 [[경남대학교|해인대학교]](現 경남대학교)학생 5,000~6,000명[* 이때까지만 해도 대학생들의 참여는 상대적으로 미진한 편이었다. 앞 주석 참고.],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도 시위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 정도면 시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시민들은 학생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고 시위 대열에도 합류했다. 이윽고 오후 6시경 성난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대대적인 봉기에 나섰다. 이날 마산시청와 마산경찰서가 시위대에 의해 습격당했다. 또 남성동, 북마산, 오동동, 중앙동, 신마산파출소가 파괴되었으며 [[자유당]] 소속 [[허윤수]] 의원의 집과 그가 경영하던 공장들도 시민들에 의해 부서졌고 시민들은 마산경찰서 습격 당시 탈취한 [[수류탄]] 13개를 탈취하여 경찰서 건물에 던지기까지 했다. 이외에도 경찰서 앞 서장 지프차가 전소되기도 했다. [[:파일:12312413.jpg|당시 파괴된 남성동파출소]] 그날 밤 9시 30분경 경찰은 또 발포했고 한 명[* 당시 신문자료는 물론이고 역사책에서도 '2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정작 의거 당시 사망자 12명의 신원과 [[http://www.masan315.net/opp/sub_05_01.asp|사망 경위]]를 보면 '''2차 항쟁 당시 사망자는 1명으로 나타났다.''' 또 [[http://www.masan315.net/opp/sub_03.asp|상황일지]]에도 4월 11일 경찰 발포로 1명이 죽었다고 나와 있다. 참고로 당시 사망자 12명 중 9명은 제1차 마산의거로, 1명은 제2차 마산의거로, 2명은 4월 26일의 시위 당시 각각 사망하였다.]의 시민이 사망했다. 하지만 이는 마산 시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고 마산 시민들은 경찰들과 [[공방전]]을 벌이며 대치했다. 시위대는 자유당 마산시당, [[서울신문]][* [[서울신문]]은 [[대한매일신보]] 시절에는 강한 야당 성향을 보였지만 [[조선총독부]]에 인수되어 [[매일신보]]가 된 이후 철저하게 집권여당 성향의 어용신문이 되었다. [[21세기]] 들어서도 서울신문은 정권이 바뀌자마자 논조가 바뀐다.] 마산지사, 국민회 사무실, 마상경찰서장 관서, 마산소방서, 마산시장 박영수의 집 등을 파괴하며 기세를 올리다 밤 12시경 해산했다. 시위는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이어졌고 마산의 행정은 온통 마비되었다. 12일에는 시민들의 시위가 재차 일어나 학생 수백여 명을 포함한 수천여 명의 시위대가 마산 시내를 온통 휩쓸었고 [[노인]]들까지 시위에 동참하였다. 13일에는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해인대생[* 현 [[경남대학교]]] 수천여 명이 시위를 했다. 매번 시위 때마다 고등학생, 대학생을 비롯하여 학생과 시민 수천여 명이 모여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묻고 3.15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이 때도 정부는 공산당의 사주가 있다면서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려고만 했다. 정부에서는 2차 마산 시위를 공산당이 사주한 것이라고 몰아붙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날 난동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했으며 15일에도 공산당 선전 때문에 마산 "폭동" 이 일어났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때는 부산일보와 동아일보가 이미 11일 당시에 취재하고 전국에 특종을 터뜨린 상태였다. 이때 기자가 훗날 할 말은 하는 정치인으로 국회의장까지 오른 [[이만섭]].]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소위 "대공 3부 합동수사위원회"를 구성해 "'''[[빨갱이|적색분자]]들의 준동 혐의에 대해 과학적으로 수사하겠다'''" 고 하는 한편 "'''이번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 이라고도 하였다. 이 즈음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수는 다음과 같다. * [[마산고등학교|마산고]], [[마산용마고등학교|마산상고]], [[마산여자고등학교|마산여고]], [[성지여자고등학교|성지여고]], 제일여상(현 제일여고, 이상 마산지역), 청주공고, 청주상고, 청주고, 동래고, 총합 3,000여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